Archive for March, 2009

이상과 현실과 허구와 도덕과

Monday, March 30th, 2009

나는 지난번의 글에서 개인적 이상의 추구로 인한 현실과 허구의 혼동 그리고 올바른 현실적 선택의 장애의 가능성을 시사했는데, 문득 그러한 현실적인 선택의 ‘기준’이 바로 개인이 추구하는 이상이 아니었던가 하는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일 이상의 추구가 선택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기본 요건이라고 가정하고, 지난번 글에서 적었던 이상의 추구가 가져오는 현실과 허구의 혼동의 가능성 또한 참이라고 가정했을 때, 이상의 추구가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성과는 이상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의 임의선택의 연속이 가져올 결과에서 크게 다를바없지 않은가?

인간이 전지적인 존재가 아닌 이상, 인간은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을 성취하기 위한 선택에서 그가 인지하는 세계의 현실, 즉 사고의 지평선이라는 한계에 의거하여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 한계때문에 그는 그가 인지하는 범위내의 현실과 허구를 분명하게 잘라낼 수 없다. 반복하자면, 인간은 전지적 존재가 아니다.

인간의 불완전함으로 인하여, 계속되는 판단의 시행은 현실에 의거할 수도 있고, 허구에 의거할 수도 있다. 전자는 이상의 추구에 다가서는 걸음이 될 수 있으나 후자는 오히려 이상의 추구에서 멀어지는 방향이 될 수도 있다.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하자면 어떤 한 순간에 판단한 현실과 허구의 구분 역시 그 다음의 판단에 이르러서야 잘못되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릴 수도 있다. 지금까지의 이 모든 가정들이 참이라고 생각한다면 인간이 이상에 준거하여 결정하는 판단들의 가치는 인간에게 제한된 범위를 넘어서게 되면 전무하다.

그렇지만 나 스스로도 이러한 사고를 통해 ‘이상이 거세된 삶’의 가치를 주장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분명 인간의 제한된 세계는 계속해서 팽창해나간다. 사람의 삶은, 그 연속성의 인정과 부정을 논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 자신의 세계를 확장시켜나간다. 그렇다고 한다면 분명 한 순간에서는 개인의 이상의 추구가 가치를 갖는다.  비록 확장되어가는 세계의 끝에서는 그 의미를 갖지 않지만, 특정한 두 점 A와 B의 사이라고 하는 구간에서는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리의 무한하게 팽창하는 세계를 처음과 끝이 있는 구간의 세계로 다시 한정짓게 되면 그 제한된 범위에서는 개인의 이상의 추구는, 비록 그 끝나는 점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허구와 현실을 혼동할 가능성이 존재하지만, 가치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만들어내고 인간의 고민을 만들어내는 근원이 된다. 인간은 전지적 존재가 아니다. 그 끝나는 점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올바르지 못한 가치 판단과 이상의 추구에 계속해서 휘말려들 수 밖에 없다.

그에게 주어진 두 방법은 이상적 원칙을 절대적으로 지켜내는 것 - 가장 도덕적인 방법 - 과 어떠한 시점의 관측에 의거하여 원칙을 변화시키는 것이 될 수 있다. 첫 번째 방법은 아마 때에 따라서 훨씬 더 큰 어려움을 낳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나 균일한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할 수 있다. 반대로 두 번째의 방법은 인간의 불완전함으로 인해 순간적으로는 더 큰 이득을 만들어 낼 수 있으나 균일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신은 안정을 추구하겠는가, 혹은 모험을 추구하겠는가? 우리는 일반적으로 전자를 도덕적인 사람이라 칭송하고 후자를 비난한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인간은 모두 후자에 해당한다. 전자에 조금 더 가까운 사람들이 적은 비율로 존재할 뿐이다.

P.S. 그리고 이 모든 길고 난잡한 논쟁을 일시에 소거하는 현명한 답안은 바로 인간 자유의지의 부정일것이다.

현실의 현실

Sunday, March 29th, 2009

#0. 현실이란 것도 정의할 수는 없겠지만,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가정과 제한을 통한 방법으로 일반적으로 우리가 ‘관측계’와 ‘사고계’라고 암묵적으로 동의한 공간에서의 존재가 논리적으로 합당한 현상을 지칭한다고 하자. 반대로 허구란 그러한 현실에 상대되는, 우리가 암묵적으로 동의한 관측계와 사고계에서 취하는 관측과 그의 논리적 판단에 부합하지 못하는 현상을 지칭한다고 하자.

#1. 그렇다면 개인의 이상이란 사실상 허구와도 다를바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그러한 개인의 이상과 현실의 차이는 스트레스를 만들어내는 주요한 원인이다.

#3. 위의 사항들을 고려했을 때, 사람들에게 그들이 선호하는 - 즉 개인의 이상에 가까운 - 허구와 그렇지 못한 현실이라는 선택이 주어졌을때, 과연 그들은 어느 쪽을 믿겠는가? 당신이라면,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 어쩌면 개인의 이상의 추구가 올바른 현실적 선택이라는 과제에 대하여 방해로 작용하지는 않을까?

Milk It

Thursday, March 26th, 2009

#1. Milk It
오늘의 나는 Nirvana의 Milk It을 계속해서 듣고 있습니다. 아이팟의 배터리가 다 떨어질 즈음 나는 집에 돌아왔기에 방 안의 작은 스테레오는 계속해서 같은 곡을 연주하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나는 커트 코베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만일 커트가 아직까지 살아있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긴 했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2. Salvation
지난 번 기차 안에서 나는 무의미하게도 (why so serious?) 구원과 종교와 도덕같은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나는 아마 구원의 손길을 뿌리쳐버릴 것 같습니다. 나는 그만큼 어리석습니다.

재미있게도 나는 기저에 있는 나의 사고와 기독교의 유사성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나의 과거에서오는 죄를 잊지 않고 있으며, 기독교는 태어나면서부터의 원죄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점도 있습니다. 나는 나의 죄를 메시아의 핏방울로 씻어낼 만큼 용감한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그럴 수 있었다면 아마 커트가 흘린 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해졌을겁니다.

여하튼 그래서 나는 나의 구원에게 물어 볼 참입니다. 당신이 눈 앞에 서 있는데 홱 돌아서버리는 나 같은 구제불능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말입니다.

#3. Dog
힘든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오자 오늘도 강아지는 내게 달려와서 안겼습니다. 십여년을 반복해오는 일이지만 그는 오늘도 잊지 않고 달려와서 안겼습니다. 나는 그를 사랑합니다. 비록 그는 음식 앞에서는 나를 저버리지만, 다른 식구들 앞에서는 나를 저버리지만, 적어도 집에 들어오는 순간에는 내게 달려와 안기는 일을 잊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이해타산을 그대로 드러내는 점이 사랑스럽습니다. 자기가 귀찮을 때는 날 물어버리기도 하지만, 반대로 자기가 심심할 때는 공을 물고 와서 짖는 점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런 그가 세상을 떠난 뒤의 삶을 그리기가 힘듭니다. 하긴,

그는 오늘 문득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고양이 동화를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아마도 그가 우리 집에 오기도 훨씬 전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할머니와 고양이의 이야기였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거쳐 마지막 장면에서 할머니가 고양이의 이름을 부르지만 고양이는 어둠 속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습니다. 나는 그 ‘우두커니’ 남겨져 있는 기분을 몇 번 맛봐야했습니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과 우두커니 남겨진 나. 어린 나는, 십 몇년 전의 나는 그 동화를 읽으며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울지 않고 남겨져 있는 법을 배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가 떠나갈 때에도 딱히 울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고 해서 우두커니 남겨져 있는 내가 달라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기차 안에서의 메모

Tuesday, March 24th, 2009

나는 아마 평생을 고통받거나
누군가의 손에 의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이대로의 삶을 유지하거나
종교 -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의미하는 바와는 유사하나 다른 의미에서 - 의 빛 앞에 무릎꿇게 되리라는 것이다.

전자는 나의 도덕적 판단이며
후자는 나의 심장 속 욕망이다.
절대적인 면에서 시비를 논할 순 없겠으나
사회가 내게 학습시킨 도덕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 도덕은 동시에 내가 종교에 귀의한다한들 다른 이들에게 지은 죄를 신에게 전가시키지는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Symphony No.6 in b minor, “Pathetique” op.94 - Finale. Adagio lamentoso

Monday, March 23rd, 2009

갑자기 울컥.

망할…